虛堂 박의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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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향일기

청평사 평양공주와 상사뱀 이야기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3-01 18:20
조회
139
http://www.kwnews.co.kr/page/view/2022032400000000047



대학 은퇴하자마자 서울 삶을 정리하고 춘천에 정착해 새 삶을 꾸려가고 있다. 문화해설사는 바로 내게 부여된 새 삶이다. 해설을 위해 출퇴근하는 소양댐 언덕길, 청평사 오솔길, 실레이야기 길 등은 모두 아름다움 그 자체라서 늘 행복하게 오가고 있다.

길지 않은 해설 기간이지만 외지인이 보는 시각은 원주민과 다를 수 있기에 그간 해설지에서 느낀 소회들을 정리해 나가 보려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꼭지로 청평사에 관한 이야기다.

청평사는 이자현 등의 고려 선사들에 의해 조성되어 고려선원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청평사는 당 태종 딸 평양공주를 십년 이상 휘감고 있던 상사뱀을 떼어낸 ‘회전문’ 전설로도 유명하다. 조선 명종 때 지어진 ’회전문’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청평사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주고 있는 유일한 보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사뱀’과 ‘회전문’ 설화가 일관되게 전달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우선, 고려선원과 당 태종은 그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십 년 넘게 공주를 휘감고 있던 상사뱀이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아침 공양을 위해 공주를 풀어주었다거나 혹은 목욕재계 후 풀었다는 설 등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청평사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고구려 아도화상이 신라로 가는 길에 청평사를 건립하였다는 전설이 나왔다. 아도화상은 그 생존 시기가 당나라와도 일치하고 건봉사, 선암사, 대흥사, 전등사 등을 창건한 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신라로 이동하던 아도화상 이 청평사 터에 조그만 암자라도 지어놓고 움직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어차피 당 태종에게는 평양공주라는 딸은 없었다. 그렇다고 평양공주의 원나라 설은 더더욱 진실과 멀어진다. 공주탑 조성 연대가 신라말 고려 초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공주는 청평사 설화 속에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 따라서 기록이 아닌 전설로서의 청평사 창건 시기만 아도화상 때로 맞추면 설화가 명확히 전달되어 진다.

윤회를 의미하는 ‘회전문’에 관한 설명도 공주설화와 연관시켜야만 리얼하다. 회전문에 관해서 대다수 관람객들은 ‘돌아가는 문’이나 ‘윤장대’를 연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공주 전설과 ‘회전문’ 설화를 다시 정리해 보자.

당나라 평민 청년이 평양공주에 반해 상사병을 시름시름 앓다 그만 죽고 만다. 이후, 뱀으로 환생한 청년은 공주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공주는 뱀을 떼어내기 위해 온 당나라를 돌며 온갖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허사였다.

뱀에 휘감긴 공주는 마침내 청평사에 와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신라 사찰에 가서 가사불사를 하면 뱀을 떼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신라 유학 승의 권고에 따른 궁여지책이었다.

다음 날 아침 청평사 경내에 들어가기 위해 공주가 회전문 앞에 멈춰 서자 웬일인지 뱀이 꿈틀거리면서 통과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공주가 뱀에게 잠시만 풀어주면 얼른 절 안에 들렀다 나오겠다고 하자 뱀은 어쩔 수 없이 공주를 풀어주었다. 공주가 절 안에 들어서니 경내에서는 마침 가사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도와주게 되었다.

한편, 기다리던 뱀은 공주가 돌아오지 않자 내키지 않는 ‘회전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들어서자마자 내려친 천둥벼락으로 그만 즉사하고 만다.

가사불사를 끝낸 공주가 ‘회전문’에 돌아와 보니 뱀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냇물을 따라가 보니 뱀의 시신이 구송폭포 아래에 둥둥 떠 있었다. 공주가 시신을 수습한 후 삼층탑을 세워 기리니 바로 공주탑에 얽힌 설화다.

청평사 표지판들을 이 콘텍스트에 맞추어 다시 세운다면 그동안 지속 되어 온 공주설화에 관한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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