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堂 박의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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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골 이야기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10-01 06:36
조회
123
삼한골 이야기(북파공작원과 삼한골 훈련소)

춘천 신북 발산리는 맥국 터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유물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고, 관련 기록도 애매모호해 그 존재 자체에 관한 터무니없는 주장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양강과 자양강이 만나는 기름진 삼각주에 혈거지와 고인돌이 다수 존재하고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부족이나 나라가 존재했을 터이지만 그 게 맥국인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묘연하다.

그런데 이 발산리 깊은 계곡, 삼한골에 국립춘천숲체원이 개장되어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춘천은 국내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연이 잘 보존된 도시지만, 특히 삼한골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인적이 끊겼던 곳이라 청정지역으로 남아있다. 이곳에는 8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북파공작원(HID) 양성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간첩은 북에서 남으로만 암암리에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동란 이후 만 3천여 명의 공작원이 양성되어 북파되고, 이 중 8천 명 가까운 실종자가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남파 공작으로는 1968년 김신조의 124군 부대가 집단으로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반면에 남쪽의 북파 간첩이나 그 훈련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1971년 인천 실미도에서 훈련 중이던 북파 공작 요원들이 집단 탈출해 한강을 넘으면서 비로소 북파공작원들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었다. 이 스토리는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천만 관객 클럽에 진입하기도 했었다.

실미도 사건으로 북파 간첩의 존재가 대중에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지만, 서울의 청계산 계곡과 북한산 청수장에서는 한국동란 때부터 이미 공작원을 양성하여 북에 파견하고 있었다. 주로 적의 척후를 교란하거나 게릴라 작전 수행이 주 임무였다.

정부는 은밀하게 수행된 북파 간첩 특성 때문에 그 존재에 관해서 일체 함구해 왔었다. 북파공작원은 존재 자체가 정전협정 위반이기 때문에 더더욱 공개 대상이 아니었다.

군번이나 계급이 부여되지 않은 북파 공작원들은 임무 수행에 성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실패하면 자폭하거나 살해될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투항하기도 했지만, 이중간첩으로 남파되어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북파공작원들은 상당수가 사형수 또는 범죄자 출신이었다고 한다. 발산리 마을 사람들은 한때 삼한골을 사망골로 불렀었는데 삼한골에 자칫 발을 잘 못 들였다가는 뼈도 못 추릴 만큼 린치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아픈 상처를 품고 있는 삼한골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파공작원들 덕택에 오늘의 국립춘천숲체원이 있게 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숲체원 개장 후, 사람들이 몰려들고 가뭄까지 겹치면서 청정 계곡물에 이끼가 끼기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 발길이 청정 자연에 끼치는 해악이 얼마나 큰지를 웅변하는 사례여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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