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堂 박의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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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향일기

화두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10-22 18:09
조회
98
통골에 농막 지어 놓고 왕래할 때 얘기다.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긴 했지만, 대부분 시골 사람들과는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세월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같이 덮쳐 흘렀으니 시골 사람들에게만 순박함과 순수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은 여전히 이웃 간 정이 넘치고 허물없이 터놓고 지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 통골에 이십여 년 전부터 들어와 살던 도시 사람이 있었다. 이 도시 사람은 통골 사람들과 십여 년 넘게 잘 지내오다가 어느 겨울 운전 중 동네 빙판길에서 이웃과 접촉사고를 내게 되었다. 이후 이 도시 사람은 시골 이웃들과 불편해지면서 남남처럼 지내게 되었다. 통골 왕래하면서, 나름 경우가 밝은 동네 이장에게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오랫동안 이웃과 잘 지내오다가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아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랑말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겪으면서 통골 도시 사람 입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터놓고 가깝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시골이라고는 하나, 이웃과 불편하게 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이웃과 잘 지내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금상첨화 대신 금상만으로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골 생활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이웃 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집을 짓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이웃을 피해 돌아앉아 있는 환경도 좋다. 불편한 이웃과 시도 때도 마주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아예 이사 나가는 것도 대안의 하나겠지만 이사 가는 곳이라고 해서 이웃과 편안하게 지내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은 이웃을 투명인간 대하듯 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이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는 소위 중도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해보는 일이다. 어찌 보면 수행에 가까운 생활일 수도 있겠지만 진여불성眞如佛性 즉 중생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고 또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수행은 꼭 출가하여 절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집에서 이웃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지낼 수만 있다면 바로 재가在家 수행에 다름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경우 화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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